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난의 변 (문단 편집) ==== 정도전의 명나라 내전 예측과 제3차 요동정벌 시도 ==== [[공민왕]]과 [[최영]]에 이어 [[제3차 요동정벌]]을 단행하려 한 [[정도전]]은 일찍부터 명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홍무제 주원장 사후 명나라의 정치역학관계를 나름 계산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주원장이 죽은 후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건문제|손자]]와 다른 황숙들간에 내전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누가 황제가 될지는 몰라도 명나라의 내전이 오래갈 것이며 이는 [[위화도 회군]]때와는 달리 조선에게 훨씬 유리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우왕 때 최영이 요동정벌을 주장할 당시 명나라는 이미 중원을 평정했고, 북원과의 싸움은 한마디로 국경분쟁이었으나 정난의 변은 말 그대로 중원 전체가 헬게이트화되는 내전이었다.] 조선은 이때 쉽게 요동을 접수할 수 있을 거라 계산했다. 그리고 실제로 [[영락제|연왕 주체]]는 [[건문제|조카]]를 상대하기 위해 요동을 거의 비우다시피하고 자신의 모든 사병들을 내전에 투입했다. 물론 누구나 다 알듯이 [[정도전]]은 주원장이 죽은 그 해에 요동정벌을 시행하기 직전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역사학도들이 정도전이 옳았다느니 이방원이 사대주의 매국노였다느니 하는 떡밥을 뿌리며 온갖 키배를 뜨곤 한다. 실제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이어 [[제3차 요동정벌|정도전의 요동 정벌]]이 [[1차 왕자의 난|왕자의 난]]으로 저지된 후, 조선은 더 이상 요동 지역 점령을 꿈꾸지 않게 된다. 이에 정도전의 요동정벌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난의 변이라는 좋은 기회를 왜 활용하지 못했느냐고 하며 태종 이방원을 비난하고, 반대측은 백성을 들먹이며 최영의 요동 정벌을 반대한 세력이, 그때와 정황이 달라졌다고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또 일시적으로 요동을 정벌하더라도 그 후 중원을 차지한 최후의 승자가 요동을 그냥 내버려둘리 만무하며 최악의 경우 명나라가 조선 본토를 침공해왔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이에 [[정도전]]과 [[남은]] 일파를 지지하는 측은 이들이 요동정벌을 구상하게 된건 명과 잘 지내려 하는데도 지나친 의심증으로 어그로를 끈 홍무제 주원장의 태도 때문이며[* 당시 <표전문 사건>에 관련해 명나라에 파견된 조선 사신 김약항 등이 죽임을 당했는데(참수설과 귀양 병사설이 있다), 타국의 사신을 함부로 죽인다는건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이다.], 가능성 역시 주체가 결국 내전에서 승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먼저 전제로 깔아놓고 내린 결론일 뿐으로 만약 정난의 변 당시 조선이 연왕의 뒤통수를 갈기는 식으로 양측의 전력을 엇비슷하게 유지시키는 쪽으로 지속적으로 중원의 정세에 깊숙히 개입했다면 명나라의 내전은 훨씬 더 오래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중국 대륙의 판도 역시 조선의 개입으로 여러 변수가 더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의 개입으로 중원이 '북명'과 '남명'으로 영구 분단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가능성을 말하자면 조선이 명나라 건문제의 편을 확고히 들어 요동을 받는 댓가로 연왕측의 후방을 공격하여 연왕 세력들을 건문제의 명나라와 함께 협공으로 완전히 멸망시키거나 혹은 건문제와 내전중인 연왕측과 강화를 맺어 결론적으로 중원 세력으로부터 요동을 완전히 할양받는 그런 시나리오들도 예상해 볼 수 있다. >각도에서 군적(軍籍)을 올렸다. 이보다 먼저 남은(南誾)·박위(朴葳)·진을서(陳乙瑞) 등 8명의 절제사(節制使)를 보내어 왜구(倭寇)를 방비하게 하였는데, 왜구가 물러가매, 남은은 경상도에서, 박위는 양광도 에서, 진을서는 전라도에서 군사를 점고(點考)하여 명부(名簿)를 만들게 하고, 그 나머지 여러 도(道)에는 안렴사로 하여금 군사를 점고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군적(軍籍)을 만들어 올리게 되니, 경기 좌•우도와 양광도 ·경상도·전라도·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강릉도(江陵道) 등 '''8도에 마병(馬兵)·보병(步兵)과 기선군(騎船軍)이 합계 208,000여 명이고''', 자제들과 향리(鄕吏)·역리(驛吏)와 여러 유역자(有役者)가 100,500여 명이었다. >----- > -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5026_003|각도에서 군사를 점고하여 군적을 올리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5월 26일 경오 3번째 기사 (1393년) 일단 병력 규모부터 본다면 [[태조(조선)|태조 이성계]] 시절 조선군의 총규모가 200,000여 명이었다고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병력 규모로 봤을 때 확실히 조선 입장에서는 요동정벌이 아예 불가능하지만은 않아보이는 상황이기는 했다. 물론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정난의 변으로 명군이 서로 연왕측과 건문제측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는 통에 요동에 추가적인 명군의 지원이 더 없을거라는 점도 그 자체로 크게 유리한 부분'''이었으며 거기다 당시 조선측에는 한 가지 유리한 점이 더 있었는데 정난의 변 당시의 명군은 홍무제 [[주원장]]의 대규모 숙청으로 명나라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던 남옥(藍玉) 같은 우수한 명장들이 대거 제거[* 남옥(藍玉)만 하여도 '''남옥의 옥'''(藍玉案)으로 주원장 손에 죽었는데 이때 연루되어 죽은 자가 모두 15,000명이었을 정도로 그 숙청의 규모가 매우 컸고, 남옥이 무장 출신이었던 탓에 군부에서의 숙청도 대규모로 이루어졌다.]당하여 군 지휘부의 기량이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명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장군인 남옥, 서달, 상우춘 등은 다들 주원장의 라이벌이었던 진우량(陳友諒) 또는 원나라의 몽골군을 격파한 명장들이었고, 그 외의 풍승, 목영, 탕화, 장옥 등을 보면 능력이 결코 부족하지 않은 장수들이었는데 주원장의 대규모 숙청의 영향과 기타 이유 등으로 3차 요동정벌 시기에 이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다.] 여기에 과거 인기를 끌었던 KBS의 [[정도전(드라마)|모 사극]]에 나오는 [[정도전]]과 [[조준(조선)|조준]]의 대화를 들먹이며 정도전의 요동정벌이 이루어졌다면 조선은 [[병자호란]]의 참화와 [[삼전도의 굴욕]]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jeongdojeon&no=94078&page=1&search_pos=-98963&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궁중잔혹사|#]][[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6dragons&no=124150&page=1|#]] >比燕兵漸逼,帝命遼東總兵官楊文將所部十萬與鉉合,絕燕後。文師至直沽,為燕將宋貴等所敗,無一至濟南者 > >연왕이 경사(남경)에 점차 육박해오자, 황제가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양문(楊文)에게 명하여 거느린 부(部) 100,000명을 거느리고 철현을 합쳐, 연의 후방을 끊게 하였다. 양문의 군대가 직고(直沽)에 이르러, 연의 장수인 송귀(宋貴)에게 패배하여, 단 한사람도 제남에 이르지 못했다. >----- > - 《명사》 <철현전> >建文三年,燕兵掠大名。王聞齊、黃已竄,上書請罷盛庸、吳傑、平安兵。孝孺建議曰:「燕兵久頓大名,天暑雨,當不戰自疲。急令遼東諸將入山海關攻永平;真定諸將渡盧溝搗北平,彼必歸救。我以大兵躡其後,可成擒也。今其奏事適至,宜且與報書,往返逾月,使其將士心懈。我謀定勢合,進而蹴之,不難矣。」 > >건문 3년, 연의 군대가 대명(大名)을 약탈하였다. 연왕은 제태와 황자징이 이미 내쳐진 것을 알고, 글을 올려 성용과 오걸, 평안의 군대를 파해달라고 청했다. 방효유가 건의하길 "연의 군대는 오래동안 대명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날이 무덥고 장마까지 지고 있으니, 응당 싸우지도 못하고 절로 질병에 시달릴 겁니다. 급히 요동의 여러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산해관을 들어와 영평(永平)을 공격하게 하고, 진정(真定)의 여러 장수들은 노구(盧溝)를 건너 북평을 치게 한다면, 저들은 필히 돌아가 구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군으로 그 후방을 짓밟으면, 가히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연왕의 주청하는 자가 마침 왔으니, 의당 또한 그에게 답서를 주어, 왔다가 도로 돌아가게 하여 달을 넘기면, 그 장수와 군사들의 마음은 풀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모의를 확정하고 세력을 합쳐서, 진군하여 뒤쫓으면 어렵지 않습니다"라 했다. >----- > - 《명사》 <방효유전> 다만 위의 사료를 참고하면 내전 중인 상황에서도 요동 지역에 명나라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요동 정벌을 한다고 해도 빈집털이 수준은 아닌 요동에 있는 명나라 주둔군과 싸워 이겨야 요동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위에도 나와있듯이 요동군이 [[건문제]]의 명령을 받들어 연나라의 후방을 치려다가 패하기도 한걸 보면 평상시보단 수월하게 요동을 점령했을 가능성은 높긴 했다. 왜냐하면 연왕에게 패배하면서 줄어든 병력과 연왕측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요동군의 모든 신경은 연왕측을 경계 감시하는데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습적인 조선군의 요동군 후방 공격은 분명 조선군에게는 굉장히 유리한 부분이라 볼 수 있다. 다만 요동군이 연왕군과 조선군에 모두 시달리는 형국이 되면 그래도 자국인 연왕측에 투항할 가능성도 존재하므로 오늘날 와서 보면 모든게 미궁의 영역이긴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